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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G MISSION0, MISSION5
    2 2014. 11. 16. 12:51

    PRELUDE

    Thoreau Yale

    2013.11.25.​

     

    ***

      몸에는 열이 오르고 눈앞에서는 눈꽃이 피었다. 함께 훈련을 받던 동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은 매서운 맹수의 땅. 밤이 되면 필시 땅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침을 뚝뚝 흘릴 짐승들이 선연했다. 신음 아닌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나는 다쳤고, 기력이 쇠해있었고, 부족했다. 온갖 것들이 들끓는 이 숲에서 내가 오롯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확률은 빤히 보이듯 적었다. 작은 짐승을 잡아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불을 피워 맹수들의 접근을 막는 것 또한 한계에 다다르리라.

      상황은 당황스러울 만큼 갑작스레 벌어졌다. 기사가 받는 훈련 중에는 가끔 네 명이 한 조를 이뤄 지정된 루트를 통과하는 훈련이 있었다. 비록 루트가 숲이라고는 하나 오랜 시간 선배 기사들이 지나왔던 길이었기에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오히려 이 훈련은 쉬이 통과하지 못하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쉬운 훈련이었다. 애당초 훈련의 목적이 기사들의 무예 실력을 보려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넷이서 함께 협력하며 며칠을 보내고 다시 집결지로 되돌아가면 되는 이 쉬운 훈련의 도중, 마물들이 나타났다. 이성이 없는 것인지 이성을 잃은 것인지 모를 마물들이 우리를 덮쳐 우리는 검을 빼어 들었다. 르마의 힘을 가진 기사가 힘을 써도 역부족이었다. 마물들은 쉼 없이 밀려왔고 우리는 무수히도 검을 휘둘렀다. 나에게 달려드는 마물들을 숨 가쁘게 도륙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주위에 남은 것은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진 마물들의 시체가 전부였다.

      함께 있었던 기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이 집결지에 다다른다면 나의 상황을 설명할 테고, 도움의 손길이 뻗칠지도 모른다. 그래, 어디까지나 가정이었다. 훈련 루트로 지정된 곳에 갑자기 마물들이 나타날 리는 만무했다. 더군다나 내가 가는 길에만 약속이나 한 듯 마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함정이라는 것이었다.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집안 내에서는 세력 싸움이 빈번했다. 수면에 가려져 있었다 뿐이지, 한 꺼풀만 걷어내 보면 그 아래에는 잔인하리만치 냉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것에 불이 붙었다. 발화 원인은 재산 분할 문제였고, 그 심지에는 나의 배다른 형님이 서 있었다. 같은 집안임에도 끊임없는 위협이 들어왔었다. 살기 위해 노력했고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사를 희망했다. 집안의 뒷받침은 없었다. 무던한 노력과 끈기만이 나를 기사로 만들었다.

    *

      배를 주려 걸음을 옮길 기운조차 없었다. 때마침 눈에 띈 토끼를 운 좋게 잡을 수 있었다. 양 귀를 잡고 들어 올리자 토끼가 두려움에 질려 벌건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미안하다고 속삭이고는 토끼를 잡을 때 박아넣은 단검을 뽑아 목덜미에 다시 찔러넣었다. 경련하던 토끼는 아주 순식간에 죽었다.

      무리에서 배척된 하이에나 한 마리가 피 냄새를 맡고 어슬렁거렸다. 불을 피워 쫓은 후 나무 위로 올랐으나 짐승은 포기하지 않고 나무 기둥 주위를 맴돌았다. 굶주렸는지 기어이 나무 위로까지 발톱을 박으며 올라오려는 놈을 보고 작은 활을 꺼냈다. 화살이 짧을수록 파괴력은 강해진다. 짧은 화살을 활에 걸고 놈의 눈을 겨냥했다. 피잉, 단말마 같은 소리가 작게 울리고, 살은 짐승의 번들거리는 눈알에 정확히 명중했다. 박아넣던 발톱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통에 난폭하게 날뛰는 짐승에게로 무모하다시피 파고들어 놈의 옆구리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붉은 피가 묻은 검을 뽑아내 연이어 목덜미를 몇 번이고 찍었다. 곳곳에서 터진 뜨거운 피가 얼굴과 몸을 적셨다. 짐승이 발치에 묵직하게 쓰러졌다. 불에 덴 듯 얼굴이 홧홧했다.

      어느 때에는 짐승이 나를 덮쳤고 또 어느 때에는 마물이 나를 덮쳤다. 도망친다 한들 소용이 없음을 알아 그때마다 그것들을 죽였다. 담대히 내게 오는 것들을 매번 상처 없이 죽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불을 피우던 어느 때에 나는 마물의 습격을 받았고 내 뒤를 내주었다. 억센 손톱에 등이 길게 찢김과 동시에 나는 그것의 팔을 베어냈다. 괴이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마물의 벌린 입에 검을 찔러넣었다. 마물은 내게 달려들어 입이 찢긴 채 죽었다. 나는 방심의 대가로 등을 찢겼다. 제복의 속에 받쳐입는 옷을 길게 찢어 등의 상처를 감았다. 이 상처가 잘못되면 평생 검을 다시 들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잠깐의 방심은 시리도록 아팠다.

      불을 피우면 짐승들은 어느 선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불에 대한 공포심이 그것들의 머릿속에는 뿌리 깊이 박혀있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쯤 안심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면 짐승들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슬며시 다가오는 그 발들이 나는 그리도 섬찟했다. 내가 정신을 차려 불을 더 환히 밝히고 쇠붙이를 휘두르면 다가온 만큼 다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 또한 그뿐이었다. 짐승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돌아갔나 싶다가도 밤이 되면 어느새 또다시 모여들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몇십 분조차 옳게 자지 못했다.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쪽잠이 들었다가 깨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럴 때에면 화들짝 놀라 깨어나 내가 검을 쥐고 있는지, 불은 여전 타오르고 있는지를 우선 확인했다. 신경이 점차로 예민해져 갔다. 바짝 날이 선 칼날이 목 언저리에 들이밀어 진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키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

      한계다.

     

      거칠던 숨도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소름 끼치는 적막만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연무장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눠 날을 부딪치는 쇳소리, 기합소리, 발을 옮기는 소리, 말의 말발굽 소리, 짐승과 적의 신음, 공기를 가르는 바람 소리……너무도 당연시했던 소리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적막뿐이라. 소름이 끼치다 못해 두려웠다. 짐승의 발걸음 소리는 커녕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벼 바스러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다. 나를 노리던 것들의 눈알마저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완연한 혼자였다. 고개를 꺾어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무수하던 별도 달도 구름에 가렸다. 왈칵 울음이 올랐다. 별안간 배에서 뱃가죽이 등에 붙어 죽어가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미치광이 같은 웃음이 일었다. 크게 웃고 싶은데 힘이 없어 입꼬리만 끌어올려 히죽거렸다. 피워놓은 모닥불이 달빛과 섞여 파르라니 떨었다. 그리고 또다시 적막.

      몇 시간이 지났을까. 몇 밤이 지났나. 또 다른 밤이 찾아오기는 한 건가. 눈꺼풀이 가물가물, 내려앉았다. 싸아하니 내려앉은 기온에 입김이 슬며시 피어올랐다. 꼼짝하지 않고 있는 내게 겁 없이 종종거리며 다가온 새 한 마리를 잡았다. 죄의식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배가 고팠고 살고 싶었다. 의례적으로 미안하다 중얼거리고 새의 털을 뽑았다. 이윽고 구워 먹기 위해 새의 살덩이에 나뭇가지를 꽂아 넣으면서 나는 새에게 말을 걸었다. 죽은 것은 말을 하지 못함은 당연했기에 대화는 마냥 나의 혼잣말로만 이루어졌다. 새야. 나에게는 어머니와 누이가 있단다. 내 누이는 데보라라고 하는데, 대단히 아름다우셔. 어쩌면 네게 누이를 소개해 줄지도 모르지. 듣고 있니, 새야. 작은 새야.

      몇 입 되지 않는 작은 새로 요기를 하자마자 잠이 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난 거지. 거셌던 불길이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다. 황급히 모아놓은 나뭇가지를 더듬거리고 있는데 그제야 어떤 물체가 불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던져 넣으려던 나뭇가지를 밀어두고 손에 든 검을 아프게 쥐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순식간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아무리 깊게 잤다지만 어떻게 저런 짐승이 이리 가까이 오는 기척조차 못 느꼈단 말인가. 한심함이 치밀었다. 검을 들고 눈 앞의 짐승을 경계하며 대치했지만, 짐승은 내게 일말의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짐승은 저 멀리 풀숲에 숨은 몇 개의 눈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 짐승을 살폈다. 커다란 앞발과 발달된 턱이 보였다. 곧추선 어깨뼈와 등줄기가 선명하. 매끄러운 털은 유려하고 위압감 있게 그것을 덮고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위압적인 그것은, 표범거대한 표범이었다. 저 앞의 무언가에 대적하듯 눈을 희번덕대는 표범의 시선을 쫓았다. 풀숲에 가려진 검은 것들의 노오란 시선이 불똥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나를 노리고 있던 마물들이었다. 일없이 지나던 표범이 괜스레 피에 굶주린 것들에게 표적이 된 모양이었다. 표범은 그것들에 대적하다가 빛이 보이는 이곳으로 내달린 듯했다. 희미한 정신으로 표범을 살피다가 표범의 옆구리에 나 있는 상처를 발견했다. 어느 마물의 앞발톱에 긁힌 것 같은 상처였다. 내 앞의 표범이 내게 위협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던 도중, 표범이 마물들을 견제하던 눈을 떼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표범의 검은 눈이 혹한의 겨울처럼 매섭게 빛났다.

      아, 고혹적이다…….

      죽어가던 몸뚱이가 표범의 눈빛에 환희하고 있었다. 미치광이가 다 되었군. 자조하며 가물어지던 눈을 애써 잡아 뜨자 작은 것이 보였다. 거대한 것, 그리고 그 뒤의 작은 것...털북숭이 새끼 짐승. 보통 표범보다 큰 어미 표범이 새끼 표범을 내게로 밀었다. 밀리지 않으려 버티던 새끼에게 어미는 기어코 이빨을 드러냈다. 그것은 새끼에게 보내는 독촉이자 내게 놓는 으름장이었다. 불을 피워 짐승들의 접근을 막은 사람이 나이고, 내가 무기들을 갖고 있음을 어미는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내가 제 새끼를 지켜주리라 생각한 듯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내가 새끼를 먼저 죽이거나 버리려 한다면 저가 나를 죽이겠다는 의미로 어미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두툼한 앞발에 밀린 살진 새끼 표범이 내 가까이로 와 눈치를 살폈다. 이내 어린 것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던 새끼가 내게 엉겨와 내 볼을 핥았다. 어미 표범은 내게 감겨오는 새끼 표범을 가만히 묵시하기만 했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내 볼을 몇 번이고 간질였다. 눈앞이 흐렸다.

      어미 표범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가죽이 떨어져 나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상처는 조금만 더 깊게 파였으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소리 없이 죽어가는 제 어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새끼 표범은 자꾸만 제 어미 곁으로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어미는 새끼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러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새끼는 더는 구태여 어미에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새끼를 옆에 두고 있는 나에게 상처 입은 표범이 목구멍 속으로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긁어냈다. , 그랬다. 저 어미는 제 새끼를 지킬 마지막 보루로 나를 택한 것이었다. 일시적인 보호가 아니라, 새끼 표범이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성체가 될 때까지. 새끼는 어리고 어미는 죽는다. 저 짐승으로써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으리라. 어미는 제 생명이 머지않아 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어미가 보이는 비정상적인 예리함과 강인함 역시 꺼지기 직전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같은 것일 터였다.

      새끼 표범은 내게 두려운 존재였다. 또한 일종의 안전지대인 셈이었다. 새끼 표범이 있어서 저 어미 표범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어미는 자신이 없을 때 새끼를 보호해 줄 보호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이 밝아 이동할 때 어미는 제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하러 갔다. 그럴 때면 나는 검을 뽑아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를 보호했다. 내 안전이 우선이었으나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는 지금, 내게 가장 큰 위험요소는 어미 표범이었다. 어미는 내게 제 새끼를 지키기를 종용했고 나는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새끼 표범을 호위하듯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면 어미 표범은 작은 동물을 물고 돌아오곤 했다. 그 양이 적을 때에는 내가 먹이 근처에 다가가는 것에도 이빨을 드러냈지만, 이따금 새끼에게 줄 먹이를 나도 먹을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크게 벌어진 상처 때문에 기력이 온전치 않은 표범은 종종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활을 쏘아 잡은 토끼나 새와 같은 것들을 내게서 빼앗아 제 새끼의 배를 채웠다.

      질리도록 반복되는 이동이었다. 목적은 오로지 집결지로 향하는 것이었고 사는 것이었다. 사실 이제는 지금 걸음을 놓는 이 방향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늠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매 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이곳에서 초라하게 죽는다는 사실만은 명확히 알았다. 여전히 내 뒤에서는 누가 풀었는지 알 수 없는 마물들과 짐승들이 나를 쫓고 있었다.

      몇 번째의 이동인지도 모를 만큼 지겹게 걷고 있는 도중 짐승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내 품 안에서 안일하게 고기를 씹고 있는 새끼 표범을 고쳐 안고 검을 들었다. 저 멀리서, 표범이 마물들과 싸우며 고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표범의 상처는 늘어 있었다. 매끄럽게 빛났던 털은 피에 엉겨 죽은 지 오래였다. 두툼한 앞발로 어느 마물의 머릿가죽을 베어낸 표범은 곧 다른 마물의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또 다른 마물의 머리를 송곳니로 물어뜯은 표범이 내 눈길을 의식한 것인지 일순 나와 눈을 부딪쳤다.

      가라고, 제 새끼를 데리고 가라고. 어미 표범은 눈으로 비명하며 외치고 있었다.

      어미는 나와 제 새끼를 본 후부터 마물들을 일부러 내 반대편으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어떠한 공격을 해도 개의치 않았다. 제 몸에 끝없는 상처를 내가며 어미는 제 새끼에게서 흉악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멀어지도록 했다. 어미가 아무리 평범한 표범보다 거대한 표범이라고는 하지만, 다친 상태로 마물들을 당해낼 재량은 없었다. 새끼를 안고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내 뒤로 표범과 마물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소리가 들렸다. 포효하지 못하는 것이 포효하고 있었다. 어미가 얼마의 시간을 더 끌어줄 수 있을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나아가야 했다. 쉼없는 전진,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집결지가 어디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이 숲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숲 주변국의 국경에 다다르기만 한다면 내 뒤를 쫓는 저 마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터였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발과 다리에 아무런 느낌이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새끼 표범을 품어 굽실하게 숙여있던 허리마저 지탱할 힘이 없었다. 발목에 둔한 통증이 느껴지며 발이 풀렸다. 절로 무릎이 내려앉았다. 새끼 표범이 요동치다가 이내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뒤에서는 어미 표범을 죽인 마물들이 나를 노려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새끼 표범을 한쪽 팔로 안고 남은 팔로는 앞으로 기었다. 소용이 없을 만큼 천천히 기었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몇 치라도 더 가서, 손끝이나마 어느 국가의 경계선에 닿도록. 조금 전부터 앞으로 나아갈수록 땅의 흙이 달라지고 있었다. 숲을 거의 빠져나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넝마가 된 몸은 숲을 거의 벗어났을진대 움직이지 않았다. 애꿎은 땅만 손가락을 세워 끄드득득 긁었다. 여기까지인가. 허무함에 웃음이 새었다.

      별안간 머리 위에서 화살들이 일제히 올랐다.

      굵은 살들이 시야를 검게 메웠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태양 빛을 머금고 시퍼렇게 빛났다. 아마라우스였다. 살로드 제국의 경계선에 용케도 닿았나 보다. 멍청한 눈을 하고 앞을 바라보자 내 품에서 간신히 몸을 빼낸 새끼 표범이 앉아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위험하다고 속으로 말하며 앞으로 뻗어있는 팔을 굽혀 새끼를 감쌌다. 새끼는 꼬리를 늘여 바닥을 치대고 있었다. 경계선을 건드린 건 내 손이 아니라 표범의 꼬리였구나. 몇 열이고 이어져 있을 석궁이 쉬지 않고 내 뒤의 마물들에게 날아들었다. 굵고 강한 화살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마물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마물들이 쓰러지며 땅을 울리는 진동이 여실히 내게로 전해졌다. 미동 없이 숨을 쉬다 마침내 눈마저 감은 나를 새끼 표범이 자그마한 앞발로 반복해 쳤다. 눈을 감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표범이 아무리 내 얼굴을 치며 긁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내려앉고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살로드 제국의 국경 경비가 말을 타고 내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아득하니 보였다. 이제는 검게 펼쳐진 머리카락을 물어뜯는 새끼 표범을 간신히 팔 안에 단단히 가뒀다. 점멸하던 세상은 저물었다.

     

     

    ≡≡≡≡≡

     

    If this is to end in fire

    Then we shall all burn together

    Watch the flames climb high into the night

     

    And if we should die tonight

    Then we should all die together

    Raise a glass of wine for the last time

     

    Desolation comes upon the sky

     

    ……And I hope that you’ll remember me.

     

    <I see fire >

     

    ***

    DESOLATION

    ***

    2014.02.15.

      한차례, 하늘에서 무수한 운석이 떨어진 후였다. 검디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작열하는 운석들이 추락하는 광경은 사람들의 안색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말들과 여러 맹수가 겁을 먹고 움츠려 도망쳤고 병사들 또한 걸음을 가벼이 놀리지 못했다. 땅을 밟고 선 것들을 무자비하게 덮친 운석들 때문에 피해는 심했다. 타오르는 화마에 갇혀 거동을 못 하는 것들, 운석의 불길에 스쳐 고통을 호소하는 것들, 거멓게 타 죽은 것들이 즐비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넘치는 피비린내와 섞여 풍기는 역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말 위에서 목청을 터뜨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재정비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여신이라는 작자의 행태를 겪을수록 내가 가진 정보들이 머릿속에 확연히 와닿았다. 정보망을 통해 앞서 전해 들은 소식은 쉬이 믿지 못할 것이었다. 각국의 군대가 모여 성역을 합공하는 이유는 코넬란테스의 이어지는 행보를 막고자 함이었다. 코넬란테스는 인간을 오로지 자신을 위한 도구로 바라봐 무도한 행위를 수없이 저질렀다. 거짓같은 그것이 명명백백한 진실이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상관인가.

     

      코넬란테스가 어떤 일을 했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초점을 맞춘 곳은 첫째는 대륙이었고 둘째는 롤리아스였다. 둘 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흘러가 닿은 시선이었다. 내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코넬란테스 대륙에 세워진 국가, 롤리아스에는 연인이 있기에. 코넬란테스의 걸음을 이곳에 매어 전진을 끊지 않는다면 여신의 행보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성역으로 진군한 군대의 태반이 여신과 그녀의 추종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살로드의 군대를 이끌며 선봉에 선 내 곁의 동료 기사들과 병사들도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었다. 추종자들뿐이라면 필시 열세에는 몰리지 않았을 텐데, 여신의 힘은 실로 망연한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규모로 공격을 하는 코넬란테스의 모습에 숨이 죄여왔다.

     

      세상은 붉고, 붉고, 붉었다. 태양과 태음이 사라진 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빛과 색은 희미한데도 그랬다. 아주 새빨간 화염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우리가 밟고 선 땅은 이미 끝없는 피를 먹어 더는 입을 벌리지 못했다. 대기를 메운 피비린내는 창공에까지 닿아 화마의 색에 섞여들었다. 고통에 찬 병사들의 신음과 절규마저도 붉다. 시야가 닿는 온 세상이 처절하리만치 붉기만 해 눈이 푸르게 시렸다.

     

      전쟁터는 아수라이다 못해 아비규환이었다.

     

    *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나는 단검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뜯어낸 옷단으로 묶었다. 돌이켜 생각하자면, 이번 전쟁에서 살아 돌아가기는 힘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손아귀에 쥐어진 긴 머리카락을 보며 참으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생각을 했더란다. 당신이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동시에 나를 잊었으면 하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잊든 잊지 않든 내가 이곳에서 목숨을 다한다면, 당신은 나를 잊고 다른 이를 만나 웃어야 한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머릿속에 뿌리내려 그를 얽매는 짓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라 했다. 머리카락을 받아 지니는 것도 버리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듯, 나를 잊는 것과 기억하는 것 중 선택하는 일 역시 당신의 몫. 불필요하고 거북한 일을 당신의 책임으로 미뤄둬서 미안하다. 하지만 결정에 따라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을 테니.

     

      롤리아스가 폐쇄된 이후로는 당신에게 편지를 전하지 않았다. 왕가의 최측근인 당신이니만큼 잠시라도 외부인을 만나는 모습을 행여 들켜 문책을 받을세라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은 시간들을 되짚어보다가 테오를 불러 머리카락을 쥐여주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좋으니 언제고 당신에게 전해 달라 이르자 테오는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쉬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표정을 어둡게 가라앉히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보이며 어서 가라 손짓했다. 잘려나간 검은 머리카락을 받아 쥐고 그림자로 녹아들기 직전, 그는 내게 자못 둔중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호젓한 미소는 짓지 마십시오. 어울리지 않습니다. 테오는 두 문장을 끝으로 내 앞에서 사라졌다.

     

    *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대여.

     

      당신만은 부디 무사하기를. 진심을 담아 당신에게 속삭이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먼 거리를 사이에 둔 당신과 나이지만 내 염원이 당신에게 닿았으리라 확신한다. 내게 있어 최초의 여명이자 최후의 황혼인 당신. 나로 하여금 한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게 하고 영원을 꿈꾸게 해주었던 그대, 아일리온.

     

      이유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정해져 있었다.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당신의 연인으로서 조국과 연인을 위하여. 여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베어내며 혈로를 뚫고 오로지 여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전에 없이 홧홧하다. 달궈진 바람결을 갈라내며 달리는 말의 발굽소리가 고막이 울릴 정도로 묵직한 반면 단발로 잘린 머리카락은 새의 깃처럼 가벼워 두려웠다. 몸의 상태는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이전에는 이와 같았던 적이 없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검을 쥔 손은 가벼웠고 시야는 씻은 듯 환했다. 관자놀이로 뻗은 핏줄이, 심장이, 전신의 근육이 거세게 수축한 후 요동치기를 반복하며 환희했다. 굳게 다문 입술 새로 신음이 아슬하게 탁탁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마치 생의 벼랑에 내몰린 불꽃처럼.

     

      아, 저기 여신이 있다, 시야가 전율하며 인식한 순간 몸이 빨랐다. 여신의 추종자들을 제치고 날래게 달리는 동안 말의 등에 바투 붙였던 허리를 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 없음을 안다. 검을 쥔 가죽장갑은 연인의 것, 결코 검이 미끄러지지 않을 것 또한 안다.

     

      ―당신의 이름으로. 여신에게로 검을 내질러 들어갔다고 느낀 순간 타는 듯한 고통이 등에서부터 전신까지 내달았다. 뜨겁다, 너무도 뜨거워 시야가 어두컴컴하게 잠식되고 호흡을 채 멈추기도 전에 몸이 거센 압력에 밀려 찢기듯 허공으로 던져졌다. 쉬이 내다볼 수 없는 높이의 허공에 뜨이는가 싶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내동댕이쳐지듯 땅과 맞부딪치는 충격도 컸지만, 피부가 찢긴 게 분명한 등이 바닥에 난잡하게 쓸려 이를 악물었는데도 신음이 터졌다. 부상당한 곳은 등뿐만이 아니었다. 추락의 충격을 고스란히 짊어진 몸은 내 뜻대로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했다. 염력은 여신의 힘이라고는 하나 등의 가죽을 찢은 발톱의 주인은 분명 맹수다. 엎어진 몸을 간신히 돌려 앞을 바라보니 보이는 것은 내 오랜 친구인 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생각을 이을 겨를도 없이 마주한 닐은 내 코앞에서 흥분이 가득 섞인 날숨을 거칠게 뱉고 있었다.

     

      일전 죽었던 어미 표범과 꼭 닮은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위험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나를 노리는 닐의 눈동자는 송연한 짐승의 것이요, 여전 고혹적이며 아찔한 맹수의 것. 네가 어째서. 너와 나는 동료가 아니더냐. 목소리를 내기에도 벅차 닐과 망연히 눈을 마주하니 닐이 제 입을 벌려 날카로이 벼려진 송곳니를 드러냈다. 빼곡히 들어찬 맹수의 이빨과 그 속에 자리 잡은 붉은 혀, 저 너머 깊숙이 보이는 암담한 목구멍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된다, 안된다……. 소리 없이 외치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들어 올려 닐의 옆구리로 끝을 향했다.

     

      힘주어 검날을 닐에게 박아넣기 직전, 거멓기만 했던 시야가 붉게 타올랐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소리가 먼저 붉은빛의 정체를 알렸다. 거대한 것이 창공으로부터 대지로 내리꽂히는 소리, 모든 것을 무()로 화하도록 하는 소리, 아주 잔인한……소리였다. 이번 전쟁에 참여해 처음으로 들어보았던 소리가 이토록 강렬히 뇌리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 맥없이 조소했다. 여신의 권능이다. 다시금 이어지는 향연이다.

     

      강한 빛으로 타올랐던 시야는 감기는 눈꺼풀에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닐이 내게로 날아오는 운석 일부를 제 몸으로 받아내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다리와 등을 빳빳이 세운 채였던 닐은 운석에 맞으며 내게로 엎어졌다. 일부에 불과한 파편이라지만 돌덩이의 무게와 죽은 표범의 무게는 내게 벅찼다. 닐이 찢어발긴 등의 상처에 더해 추락할 때 뼈가 부러졌는지 몸을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통증이 오른다.

     

      살이 타는 냄새가 가까이에서 끼쳤다. 등 부근이 거무죽죽하게 타들었을 닐의 사체 아래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고개가 돌아가고 눈동자가 굴러 닿은 시선시선마다 죄 참혹하기 그지없다. 모든 것은 끝없는 폐허. 근원도 연유도 종착도 모르는, 아득하면서도 근저에 있는. 고혹적이기는커녕 마냥 아프기만 한, 그런.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짊어지고 갈 업인가.

      감은 눈이 시리다. 노을을 닮은 당신의 미소가 눈앞에서 아프게 아롱진다.

     

      내가 일전 무어라 생각했던가. 당신이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 했었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했었나.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겠다, 원망하지 않겠다 했었던가. 우습기는. 모두 다 거짓이다. 영원히 간직하지 않아도 좋고 언젠가 과거를 헤아릴 때 그래,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마는, 그뿐이어도 좋다. 그러니 바라건대,

     

      보고 싶은 그대여.

      부디 나를 기억해주길.

     

      점멸하던 시야가 희게 부서지다가 이내 눈꺼풀에 흑막이 내려앉았다. 청정하기 짝이 없는 장막 그리고 암연, 모든 것은 티 없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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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ETA  (0)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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