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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ETA
    2 2017. 8. 11. 05:48

    PIETA


      너를 만난 뒤로는 꽃무덤에 잠식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매번 건네는 달디 단 말을 들을 때나 내 이름을 부르는 입술 뒤에 수많은 언어를 죽일 때, 네가 허락을 구하며 내 곳곳에 입맞출 때 그러했다. 내 무릎께에 입맞출 때에는 네가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알았으나 머무르지 말라 말할 뿐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끊임 없는 밤이었고, 서로에게 약속했듯 나는 밤이 지나도록 너를 모른 척 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하던 눈이 잠시 내게 옮아 온 것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달리 열망할 것이 생긴다면 곧 지나가겠지, 어느새엔가 내 몸에 배인 꽃향기도 날이 갈수록 휘발되리라. 무심히도 그리 여긴 날이 있었다.


      경험에서 비롯된 무정함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모두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을 얻는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던 형태와는 다른 것이라 손에 쥐기도 전에 흩어졌다. 내 사랑은 충족되기는 커녕 보답 받아 본 기억조차 없다. 그래서인지 내 손끝에 차례로 입맞추다 끝내 울어버리고 마는 네 모습에는 어찌할 바 모르고 막막해지기까지 했다.


      네가 내게 무얼 바라는지는 알고 있었다. 끝이 아니라면 항상 솔직하던 건 네 쪽이라 조금만 헤집어도 알아채기는 쉬웠다. 이름을 불러주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 할 행위와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는 욕망. 언제고 모른 척 하였으나 너는 가끔 원하는 것을 뭐든 들어주고 싶게 했다. 겁을 낼 줄 밖에 몰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 등 돌려 걸어가지 못 한 것도, 네가 원할 때마다 네 이름을 불러주던 것도, 착각하듯 희미하게나마 사랑을 속삭여 준 것도 전부 그 영향이었다.


      때로는 네 눈동자 뒤에서 내가 어떤 표정들을 짓고 있을지 가늠해 보기도 했다. 너는 내가 울기를 바라다가, 또 어느 때에는 웃기를 바라다가. 난처한 표정을 짓기를 바라다가는 오만한 얼굴로 돌아오기를 바랐지. 네 상상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든 아무렇지 않았다. 너는 이미 내 어린 애인이었으므로. 그렇기에 무너질 것도 없었다. 네가 내게 의무를 등져달라 말하기 전까지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꿈 속에서만 있어라. 꿈은 언제나 사랑했던 것들로 가득했다. 첫 번째 소녀가 내 발등에 흰 문양을 새기며 포말처럼 웃던 모습, 기쁘거나 토라질 때마다 발갛게 열이 피던 뺨, 밤이면 온갖 빛나는 것들이 쏟아지던 다갈색 눈동자, 스치듯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잔상처럼 번졌던 눈웃음. 이를테면 그런 것들. 잡을 수 없는 것들. 거대한 착각들. 꿈은 고장난 영사기처럼 내가 아끼던 순간만을 재생했고 내가 원치 않는 기억에 가 닿을 즈음이면 불에 덴 듯 거멓게 일그러졌다. 폐허를 꿈꾸느니 영원한 이별 속에 지내는 편이 낫다. 오랜 밤을 헤매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꿈은 가끔, 사랑했던 것이 아닌 사랑하게 될 것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지 않아 만나게 될 소녀들. 꿈은 내가 그것들을 사랑하고 말리라 예언하곤 했다.


      그랬던 꿈이 한 차례 뒤바뀐 적 있었다. 세 번째 소녀의 곁에 머물며 너와 마주한 이후였다. 최초의 매와 나를 동일시해 네게 기대 기도했던 밤. 눈 내린 초원이 전에 없이 새하얘 졸도할 것만 같은 밤이었다. 빌어먹을 점쟁이, 짓씹듯 내뱉은 목소리에 답해 온 너였지만 나는 너를 보지도 않고 내가 짊어진 죄악을 뱉어냈다. 퀼란. 힐렌치. 힐렌치. 퀼란. 간신히 긁어 낸 목소리로 몇 번이고 죄악의 이름들을 불렀을 때 너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조금쯤 목 죄인 소리를 내었지. 너를 지나쳐 돌아온 그 밤에는 속죄양의 꿈을 꾸었다. 사제와, 백성들의 모든 죄악을 제 목덜미에 거머쥐고 황야로 달음박질하는 흰 양의 꿈. 꿈은 찰나마다 제 모습을 바꿔 이지러지기 마련이라 꿈 속에서 내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백성의 죄를 고백하던 사제가 나였는지, 죄의 사함을 기도하던 치들 중 하나가 나였는지, 모든 죄악을 그러쥐고 내달리던 양이 나였는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자였는지, 끝끝내 울지 않던 짐승이 황야로 향하기는 하였는지. 기억나는 것은 거무죽죽한 연기로 뒤덮인 하늘과 유달리 분분하게 콧잔등을 간질이던 꽃내음 뿐이다.


      이상스레 여기기는 하였으나 깊이 담아 두지는 않았다. 그조차 내가 마주할 사랑에 관한 꿈이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석기도 하지, 네 주위를 감돌던 향기가 내게 죄악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죄악의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 있다는 소문은 매들 사이에서도 고약하게 떠돌았다. 첫 번째 소녀의 임종을 지켜보고 오랜 잠에 들었다 깨어난 때였다. 퀼란. 한 차례 비틀린 죄악. 갓 태어난 어린 것에게 죄의 이름을 씌운 그 아비 되는 자도 참으로 괴벽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떠한 모습이리라 상상을 덧씌우지는 않았으나 소녀를 찾아 내려 온 마을에서 처음 만난 너는 이름과는 닮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죄악이 지닌 냄새가 꽃향기라는 것에는 짧게 웃기도 하였지만 모두에게 다정한 네 모습에 어쩌면 내 이름이 나보다는 네게 어울리겠다는 상념도 들었다. 너는 죄악에 걸맞는 이가 아니었다. 죽어가는 것들을 관조하였다는 말에도 그 행위가 죄악이 되지는 않는다 여겼지. 그러나 지금은 그조차 오산이었음을 안다. 꽃향기가 진해지고 너는 내게만 네 이름대로 되었다.


      많은 것이 죽던 네 밤과는 달리 내 밤에는 오랜 것이 새로이 피곤 했다. 미련 많은 것들이 고개를 들 때면 나는 우리의 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지지 않을 밤을 약속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이라 확신하는 네 부정에 피어나던 것들은 죄 목이 꺾인 채 죽었다. 나는 또다시 무너진 것들 사이에서 어리석은 신음을 삼켰다.


      네가 네 이름대로 되었으나 스스로를 깊고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길 바란 건 아니었다. 사랑을 속삭이고는 그 끝이 연옥이라 말하는 너를 보며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 평이함을 가장해 꺼낸 말은 네가 새로이 지니게 될 이름에 관한 것이었다. 아비가 지어 준 이름을 지니고서는 영영 불구덩이 속을 헤어나오지 못 할 테니. 다른 이름을 지니고 안식을 누리게 될까, 묻는 말에 너는 제 속을 나로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내 이름마저 삼키고 싶다 말했다. 무던히 지나쳤던 꿈이 그제야 제 모습을 뚜렷이 했다. 속죄양. 너는 내 목에 죄를 걸고 나를 몰락시키러 온 자였다. 그러나 이제 와 무슨 상관인가, 기피하던 것조차 반쯤 지나쳤다. 너는 내가 맞이할 죄악이었다. 나는 너로 인해 영생할테니 그 모든 죄악을 끌어안고 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변덕에 목 놓은 것들이 눈만 멀겋게 뒤집고 나를 응시했다. 짓밟고 선 자리에서는 바싹 마른 재의 냄새가 났다. 한 차례 죽었으나 또다시 죽은 것들. 내가 피우고 죽인 것들.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을 외면했기에 내게 보내는 시선이 어떤 의중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원망, 어쩌면 체념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또다시 체념을 묵시하고 이번이 마지막이라 자위하며 배신에 골몰하던 것을 믿는다. 좋지 않으냐. 덧없는 기대에 죽은 것들이 요동치며 웃었다.



    ***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퀼란."


      나의 죄악. 나를 사랑하는 내 어린 애인. 손가락을 내어 우는 네 뺨을 두드렸다. 죄를 고해하듯 입술이 닿았던 손끝마다 화하다. 내가 앓았으면 좋겠다고 했지. 내가 관성이라 여기던 것들이 허물어지길 바란다고. 나를 봐, 밤이야. 사랑했던 것들, 영원할 것처럼 이어지던 속삭임, 잃어버린 낙원, 끝내 내게 다정을 바라고야 마는 너. 어느 하나 병들지 않은 것 없다. 여기에 무너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지, 나는 갈 데 없이 서성이고 너는 내게 애원하며 울고 있는데. 턱을 당겨 멀거니 올려다 본 하늘은 미치광이의 빛이라. 헤아릴 수 없이 쏟아지던 별들도 숨을 죽이고 뿌옇게 차오른 달만이 눈을 흐리며 나를 재촉한다. 기꺼이. 나는 기꺼이 명예를 살해하기로 한다. 내가 어여뻐하는 것에게 한 가지 확신을 주려 한다. 그러니 만일 존재한다면,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모든 것이 꼭 균형을 이룰 필요는 없잖냐."


      네 이름. 내가 짊어질 것. 그 이름의 뜻. 결국 저지르고 마는. 퀼란. 다시 한 번 네 이름을 속삭이는 순간 깊은 유대가 끊어짐을 느낀다. 죄악에서 피어난 어떤 기원이다. 내 소녀는 나를 탓하지 않을 테다. 배다른 형제들이 질타할 것은 관계치 않았다. 나는, 소문대로, 오만하여 저밖에 모르는 매가 아니던가. 너는 얼마든 의무를 등질 수 있다 말했으나 네가 나와 같은 불명예를 저지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오욕을 뒤집어 쓰는 자는 하나로 족했다. 너를 두고 돌아간다면 다시금 오랜 잠에 들겠지. 우리의 밤은 무너졌고 이제는 도망칠 꿈조차 없다.


      다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네가 원한다면."


      이마를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찼다. 너를 바라보는 내 표정이 어떨지 가늠조차 불가했다. 가정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네 얼굴이 전에 없이 말갛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너만이 아름답고 처연하다. 그 모습이 꼭 갓 깨어난 어린 아이 같아서, 나는 네 입꼬리에 추락하듯 입맞추며 또다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염원했다.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나와 함께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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